구황식에서 건강식으로의 변신, 감자와 고구마
08.07.28 차경희(전주대학교 전통음식문화전공)
구황식에서 건강식으로의 변신, 감자와 고구마
얼마 전 TV에서 사회 저명인사들의 식단(食單)이 소개되었다. 이들의 식단에는 하나같이 ‘건강’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는 구황식(救荒食)으로 먹었던 음식을 요즈음에는 건강식(健康食)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보리밥이 그렇고, 감자나 고구마가 그렇다. 춘궁기나 논농사가 여의치 않은 곳에서 끼니가 되었던 주식(主食)이 쌀밥을 재치고 오늘날 그 가치를 재평가를 받으며, 몸값을 올리고 있다.
매일 반갑지 않은 폭염주의보가 들린다. 시원한 그늘 밑 평상에 올라가 어머니가 쪄 주신 감자를 먹으며, 매미울음소리에 장단을 맞췄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사실 필자는 찐 감자보다는 찐 고구마를 더 좋아했다. 그런데 유난히 감자를 좋아하시는 친정어머니 덕에 감자와 좀 더 친하게 지냈다. 요즈음 어머니는 당뇨 때문에 더욱 감자를 즐기신다. 감자는 고구마에 비해 수분이 많고, 당질 함량이 적어 당뇨병 환자들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다. 감자에는 무기질의 양이 많고, 비타민 C가 비교적 안정적인 형태로 들어 있다. 특히 칼륨(K)과 인(P)의 양이 풍부하여 체질이 산성화되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짜게 먹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체내 염분 조절기능을 도와주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감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행포지(杏蒲志)」(1825)이다. 감자의 한반도 도입설에 대해선 몇 가지의 견해가 있다. 「원저보(圓藷譜)」에는 1832년 전북 해안에 도착한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라 하고, 함경도에 월경해 살았던 청나라 심마니들이 가꾸어 먹던 감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북저(北藷)는 순조 24-25년에 관북(關北)에서 처음 들어온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중 중국대륙으로부터의 유입이 가장 유력하다고 보고 있으며, 도입초기 일본으로부터 전해진 고구마를 남저(南藷)로,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감자를 북저(北藷)로 구분하였다.
감자는 고구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식량작물이 부족하였던 북쪽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감자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헌종 13년(1847)에 경기도 양주와 강원도 원주 및 철원 등지에서 구황작물로 재배되었다. 심지어 함경도 종성에서는 50-60호의 농가가 감자만으로 생계를 유지해갈 정도로 감자의 재배가 확대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이후 한강 유역의 인구 증가의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는 도입됨과 동시에 크게 환영을 받으며, 민생의 절대적인 기아를 해결했던 감자는 원산지인 안데스산맥을 떠나 유럽에서는 심한 구박을 받았다. 1570년 페루에서 처음 스페인으로 입성한 후 18세기 중반까지 감자는 독성이 있는 음식이라고 인식되어 먹기를 꺼려했고, 천한 계층에서 먹는 음식으로 폄하되었다. 때문에 계속되는 기근과 흉년, 수탈 속에도 감자는 식량원으로 보급되지 않았다. 때문에 유럽에서는 감자가 식량원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거의 2백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그에 비해 우린 이미 토란(芋)과 마(薯蕷)를 통해 구근류(球根類)의 섭취에 익숙해 있어 아무런 저항 없이 감자나 고구마를 먹을 수 있었고, 오히려 토란이나 마에 비해 조리 상의 편리함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으리라 생각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자의 구박에 비해 고구마는 유럽에서는 기후 조건상 스페인에서 경작이 잘 이루어지면서 부유층만이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았다. 달콤한 고구마요리를 즐겼던 헨리 8세의 칭송이 더하여지면서 고구마는 희귀하고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먹는 사람에게 일종의 품격을 더해 주기도 하였다. 고구마는 감자와 같이 중남미가 원산지이다. 재배한 지역이나 품종에 따라 영양성분의 차이가 있으나, 수분 함량이 65~75%로 감자보다 적다. 당질의 함량은 약 30%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설탕, 포도당, 과당의 함유량이 많아 단맛을 띠고 있다. 그 외에도 무기질의 함량이 높다. 고구마를 먹을 때 김치를 곁들여 먹었던 우리 조상들은 고구마에 많았던 칼륨의 효과적인 섭취 방법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외에도 현대인들의 식단에 부족하기 쉬운 섬유질이 풍부하여 정장기능을 가지고 있다.
고구마는 영조 39년(1763)년에 통신사의 임무를 띠고 대마도에 갔던 조엄(趙曮)이 씨감저를 얻어 부산진에 보낸 것이 최초의 전래였다. 감자보다 약 60년이나 빨리 한반도를 찾아왔다. 고구마의 도입과 동시에 그 재배법과 함께 생고구마나 말린 고구마를 쌀에 섞어 지은 고구마 밥, 고구마죽, 고구마가루를 넣은 고구마국수와 고구마다식, 고구마술, 고구마가 들어간 감저장(甘藷醬) 등이 개발되었다. 당시 열악한 한반도의 식량사정의 해결하고자 서유구를 비롯한 실학자들과 정조(正祖)가 나서서 고구마를 구황작물로서의 보급하고자 힘을 쏟았으나, 널리 재배되지는 못했다.
고구마의 공식적인 명칭은 ‘감저(甘藷)’였으나, 언제부터인가 고구마는 감저라는 이름을 버리고 ‘고구마’로 불렸다. 대신 원래 감자를 일컬었던 ‘마령서(馬鈴薯)’가 19세기 중엽 중엽부터 ‘감자’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명칭이 바뀌는 것은 고구마 보다 감자의 보급이 빨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예로 「규합총서(閨閤叢書)」․「종저보(種藷譜)」․「시의전서」까지 1800년대의 기록에 있는 감저병(甘藷餠)은 찹쌀가루에 고구마가루를 넣어 만든 찐떡이다. 그러나 이것은 감자의 도입 이후 찹쌀가루는 멥쌀가루로, 고구마는 감자로 재료가 바뀌게 된다. 그리하여 「부인필지」와 「조선요리제법」과 같은 1900년대 기록에서 감저병은 더 이상 고구마 떡이 아닌 감자떡으로 변하여 있다. 이는 감자의 보급이 고구마보다 우세하여 일반적으로 쓰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감자의 보급이 고구마를 앞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마는 감자에 대해 단맛이 강하다. 오늘날처럼 단맛이 흔하지 않았던 조선시대, 그래서 단맛에 낯설었던 조선인에게 고구마는 주식인 밥의 자리를 대신하지 못하고, 단지 간식으로만 인식되었던 것은 아닐까? 고구마가 널리 보급되지 또 하나의 이유는 재배가능한 지역의 문제였다. 냉해에 약한 고구마는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랄 수 있는 지역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마는 20세기 초엽까지는 전라도 강진을 비롯한 일부 남부 해안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작물이 되었고, 본격적인 재배는 일본으로부터 고구마에서 알콜을 뽑아내는 기술이 도입된 1915년 무렵부터였다.
지금은 자색감자에 호박고구마까지 과학의 발달로 다양한 감자와 고구마를 맛볼 수 있다. 여기에 영양성분과 효능까지 소문이 나서 그 맛을 보태고 있다. 제철에 생산되는 먹거리를 감사히 맛있고 먹고, 평안한 생활을 한다면 우린 늘 건강이라는 소망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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